"도그마95", 영화 2세기를 열어젖히는 독단적 아방가르드

TRACE 2007. 2. 1. 18:09

도그마는 현재 영화의 어떤 경향에 도전한다.

1995년 3월 13일 화요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도그마 95라는 종교적 이름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문과 함께 발표된 순결의 서약은 '감독의 이름은 크레딧에 오르지 않는다, 촬영은 반드시 로케이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등의 10가지 계명을 포함하고 있다. 이 선언을 주창한 사람은 <범죄의 요소>, <유로파> 등으로 깐느의 기술공헌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스타일리스트였던 라스 폰 트리에, 그와 함께 토마스 빈터베르그, 크리스찬 레브링, 소렌 크라이 야콥슨 이렇게 네명의 감독이 이선언에 동참하였다.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의 이전 필모그라피를 부정하는 듯한 이 선언문이 동참을 바라며 각국의 '영화 작가'들에게 보내졌을 때, 그들은 이 원칙대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그리고 원칙대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를 의심하였다. 더구나 도그마95는 '현대 영화의 바다고 강물'이라는 프랑스 누벨 바그를 '해변으로 쓸려버릴 정도의 잔물결이 되어 허접 쓰레기 오물로 변해 버렸음'을 선언하며 정면으로 비판하고, 감독의 이름을 크레딧에 올리지 않는다는 상징으로 누벨 바그의 기초이론이었던 '작가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도그마 집단은 "나는 감독으로서 개인의 취향을 자제할 것을 맹세하며 더 이상 작가/아티스트가 아님"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도그마 95의 형식을 지배하는 순결의 서약은 누벨바그 영화 양식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누벨바그 세대들의 영화는 기승전결 식의 양식화된 구성에서 벗어나려 했고, 저항과 변화를 전제로 기존의 문화 관습과 패러다임을 탈피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영화 형식에 있어서도 현장감 넘치는 핸드헬드촬영, 휴대용 동시녹음기의 사용, 자연광만으로 촬영 가능한 고감도 필름의 사용과 줌 랜즈의 사용, 비전문 배우의 기용, 그리고 영화 속의 문학, 사상, 예술서 등의 직접인용, 자막 사용, 화면 밖 나레이터 등장으로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누벨 바그와 도그마95는 영화 형식적으로는 차이가 있기보다는 오히려 유사한 부분이 많은 것이다. 도그마 집단은 누벨 바그의 어떤 부분을 비판하였던 것일까?

누벨바그와 도그마95가 갈라서는 지점은 작가에 대한 것이다.


누벨바그, 1960년대는 이제 너무나 충분하다.

1959년 장 뤽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가 등장하기 이전, 혹은 1952년 프랑수아 트뤼포가 <까이에 뒤 씨네마>에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을 발표하기 이전 프랑스 영화는 "영화적으로 예술적"이지 못했다. 트뤼포의 표현에 의하면 기존의 프랑스 영화는 문학적인 기질을 지닌 시나리오작가들의 취향에 휘둘리고 있었으며, 누가 감독을 하더라도 그것은 시나리오 작가의 영화이지 감독의 영화가 아니었다. 이들의 영화는 고상한 듯 보이지만 시각적으로 진부한 '질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이런 문학적인 '질의 전통'의 영화가 된 이유는 토키의 발명이었다. 사운드의 도입은 무성영화 시대 이후 아방가르드 영화들이 개발한 풍부한 시각적 표현력을 훼손시켰지만 19세기 유럽의 리얼리즘 소설이 정교한 이음매 없는 핍진성의 창출을 가능하게 하였다.

내러티브와 영화의 결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내러티브 영화의 우위는 유럽에서가 아니라 할리우드에서 먼저 활성화되었다. 유럽의 영화가  이 1차대 전에 의해 정체되고 있을 무렵 미국은 내러티브 영화가 가진 대중 오락물로서의 유용성에 주목하였다.

1차 대전 이후 미국 영화의 상업적 우위와 사운드의 도입은 할리우드적 리얼리즘 영화의 우위를 가져왔고 유럽의 모더니스트들에게 이미지의 예술로 비춰졌던 영화는 서사물로서의 리얼리즘, 미국의 장르영화 등은 모두 19세기 유럽 리얼리즘 소설이 확립한 고전적 내러티브에 따라 시공간을 조직하고 있었다.

2차대전이 종결된 이후 유럽의 영화산업은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고,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세계지배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벨 바그 세대들이 영화를 보았던 40년대 후반의 유럽은 미국영화가 넘쳐 났고,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영화는 미국의 소비 자본주의의 천박한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영화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영화가 기존 예술의 예술을 극복하고 새로운 예술이 될 수 있으리라는 프랑스 아방가르드 전통과 독일 신칸트학파의 기대가 무너져 버린 상황에서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주장은,'창조성, 천재성, 영원한 가치와 비밀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작가를 설정하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예술개념에 기대게 된다. 1948년 프랑스의 영화감독 알렉상드로 아스트뤽은 <카메라 만년필>이라는 글에서 '영화의 스타일은 영화의 소재와 그 소재를 수용하는 영화작가의 주관적인 태도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며 영화작가는 소설가와 같은 기능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데, 영화작가에게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부여할 것을 요구하는 이 주장은 트뤼포의「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에 의해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트뤼포를 위시한 <까이에 뒤 씨네마>의 영화동료들은 '작가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작가주의자들은 작가의 개념을 미장센의 개념과 깊게 연결시킴으로써 발전시키는데, 그것은 트뤼포를 위시한 젊은 작가주의자들이 30 - 40 연대 할리우드 영화에 열광하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2차대전 당시 상영 금지되었던 미국 영화들이 갑자기 프랑스 극장을 점령하게 되고, 어린 시절을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존 포드 등이 만든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지낸 그들은 단순한 오락물로 취급받았던 이들의 영화에서 스튜디오 시스템 아래 만들어진 이들 영화의 내용이 아닌, 공통적인 스타일에서 어떤 창조적인 정신을 발견한다. 작가주의자들은 영화의 감독들에게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려고 했고, 내용이 아닌 씬의 구성/미장센에 드러나는 스타일에서 감독의 개성을 찾아내려 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노력은 대중 오락물로 전락한 영화에 천재의 창조성이란 낭만주의 작가개념을 부여하여 영화에 아우라의 광채를 덧씌움으로써 영화를 예술로 승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트뤼포에게 작가는 전체적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한다기보다 어떤 세계관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작가는 전체적으로 부패한 사회 내부에서 인간적인 가치의 낙관적인 측면을 표현할 줄 안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 속의 인물들은 그 자신의 정신적인 노력으로 세속적인 상태를 벗어난다. 트뤼포는 작가주의야 말로 영원한 진리로의 회귀이고 낭만주의라는 프랑스의 고전적인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예술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념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 트뤼포의 작가개념은 예술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의문시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기존의 예술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던 누벨바그 이전 아방가르드의 예술관에 비해서도 퇴행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 작가주의는 미국의 평론가 앤드류 새리스에 의해 좋은 영화, 혹은 위대한 감독이 만든 정전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영화를 재단하는 하나의 이론체계로 격상되었다.

새리스는 미국영화만을 '유일하게 좋은 영화'로 끌어올린다는 민족주의적이고 쇼비니즘적 목적으로 작가주의를 이용했고, 급기야 주류에 대한 문제제기로 등장했던 작가주의는 또 하나의 주류가 되어 영화의 예술적인 완성도를 '작가'라는 신비한 기준으로 수직계열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작가주의는 어떤 하나의 감독을 '작가'로 인정하느냐 마느냐하는 문제가 평가자의 주관적 기호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뛰어난 작가의 그저그런 작품을 평범한 감독의 뛰어난 영화보다 높이 평가해야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1980년대 이후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와 같은 반인간주의적인 이론이 등장하여 '주체로서의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자 작가의 주체적 창조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작가주의는 그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작가주의가 이론적으로 유효한 비평방법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작가주의자들이 근대 예술 개념의 본질을 짚어냈기 때문이다. 예술의 개념이 불안정하고, 보편적 예술의 기준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예술을 예술로 재생산하는 것은 자율적 체계로서 근대 예술 제도이다. 근대적 예술제도는 예술의 기준으로 '창조성, 천재성, 영원한 가치와 비밀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작가를 설정하게 되는데, 이 제도 속에서 작품 이면에 존재하는 역사성이나 현실성은 지워져 버리고 위대한 작가와 그의 작품만이 초역사적으로 남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이며, 근대 예술제도는 작가에게 종교적인 후광을 가진 성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작가주의 미학 속에서 영화는, 발터 벤야민이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가 근대 예술의 특징인 아우라가 부재하고 그로 인하여 교양계층의 엘리트를 위한 예술이 아니라 그야말로 대중의 예술로서 근대 예술의 신비적 측면을 탈신비화할 것'이라는 기대와, 레닌이 '모든 예술 중에서 영화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영화가 부르주아의 예술과는 다른, 새롭게 지배계급이 된 프로레탈리아의 예술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며, 다시 부르주아의 예술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은 더욱 중요해진다.

영화의 초창기에는 미래의 예술로서 다양한 기대가 존재한다. 근대 예술의 개념이 도전하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영화 매체에서 낡고 속물화된 기존 예술을 대체할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보았다. 러시아 혁명 직후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를 본 레닌은 영화에서 부르주아 예술을 대신한 프롤레탈리아트 예술의 가능성을 보았고, 발터 벤야민의 주장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었다.

아방가르드는 기존 예술의 본질을 구성하는 형식과 개념을 의심하고 해체한다. 즉, 아방가르드는 근대 예술 제도가 확립해 놓은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예술을 의심하고 새로운 예술 수단과 새로운 표현 형식을 찾아내어 기존 예술의 관념을 내파하려 한다.

20세기초 아방가르드 운동은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서의 영화가 가진 혁신적 가능성에 주목하였고,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독일의 표현주의 그리고 20년대 소비에트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정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 이후 소비에트 영화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대체되고, 앞서 언급했듯 토키의 발명과 불안한 정치적 상황은 아방가르드 운동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아방가르드는 작가주의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진 지 100년인 1995년 '도그마 95'는 다시 아방가르드를 불러 세운다. 부르주아가 되어 버린 누벨 바그 영화 미학과 테크놀로지의 태풍이 몰아치는 오늘날 영화들 앞에서 그들은 화장술을 벗어버리고 환상이 아닌 영화를 만들 것을 서약한다. 도그마 95와 함께 발표된 순결의 서약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규칙들로 영화 원형의 모습들을 복원하려 한다. 도그마 95는 영화의 근대 예술적 지위를 해체하는 아방가르드 정신으로 무장해 영화 2세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있다.

★ DOGME 95 The Official Web Site http://www.dogme95.dk/


작성 : 1998년 여름 어느날.
"Dogma95" 의 #1 <셀레브레이션>, #2 <백치들>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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