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만대와 그의 영화들에 대해

TRACE 2007. 2. 1. 16:50

봉만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이천년>(2000)은 흔히 16mm 에로영화라 불리는 AV(Adult Video)지만 어딘가 기존에 봐왔던 AV영화와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 기존의 상업영화에 비춰서도 떨어지지 않는 각본과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감각적인 촬영과 리듬감 있는 편집은 <이천년>이 그저 단순히 일회적인 성욕의 배출을 돕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화들과는 다른 자리에 위치하게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기존의 AV영화와 차별화되는 곳은 단순히 그런 이유들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천년>이 다른 영화가 된 것은 영화가 다루는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이를테면 영화 속의 인물들이 말하는 대사 속의 단어들은 생소하게 들리지만 그 단어들은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생생한 것들이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작은 부분이지만, 이것은 단순한 대사 처리의 변화가 아니라 기존의 AV영화가 인물을 피상적으로 다루어왔다면 <이천년>은 인물들의 삶을 능동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다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었다.

봉만대 감독의 인물들에 대한 이런 접근은 그의 영화들이 다루는 인물들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봉만대 감독의 일련의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는 낙오자들이다. 그들은 백수이고, 창녀이며, 가스배달부이며, 짱깨배달부이고, 만화방을 지켜주고 잠을 자고, 가출소녀이며, 재수생, 돈없는 일본 유학생이다. 그들은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신의 것들을 지키기 위해 쉽게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며, 신문배달과 비디오가게 종업원을 하고, 가진 것이 몸뚱아리뿐이기 때문에 몸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사랑을 나누고, 친구의 생일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소매치기를 하고, 성공하고자 가출해서 상경하고, 돈을 벌기 위해 포르노영화를 찍으며, 싸우며, 우정을 나눈다. 이런 인물들이 서로를 간절히 원해서 사랑을 나누는 그 순간만큼은 누추하지만 아름답고, 화려하진 않지만 섹시하다.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갈등하는 딴따라들의 이야기를 그린 <딴따라>(2001)에 나오는 자취방 섹스씬은 매우 아름다운데, 그것은 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술집에서 연주를 하다 손님들과 싸우고 얻어터진 후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확인한 다음 서로를 위로하는 감정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2001년 작품 <아파바>는 A급 비디오배급사인 새롬엔터테인먼트가 제작비를 투자하고 쨈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한 작품으로 2001년 최고의 AV영화로 선정되기도 한 봉만대 감독의 대표작이다. 영화는 봉만대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기지촌으로 유명한 동두천을 배경으로 하여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는 무엇하나 가지지 못한 이들, 아니 제대로 가진 것도 없는데 그 가진 것 마저 뺏기고 잃어버리게 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때론 서정적으로 때론 격렬하게 그려낸다.

영화의 주인공인 바다는 자신들을 버리고 미군과 어디론가 떠나버린 엄마의 행방을 찾는다. 반쪽뿐인 가족 안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바다를 가스배달부인 파도는 사랑한다. 사실 의정부와 철원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동두천엔 바다가 없다. 동두천에서 바다를 보려면 그곳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바다와 모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잃고만 살아오다 가까스로 최소한의 안정적 터전을 마련했기 때문이며, 그것만큼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복오빠 찍새가 돌아오면서 이 최소한의 터전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며 영화는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영화 이야기는 단순히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중간중간 파도의 랩(Rap)이 첨가되는데, 이 랩은 영화의 메시지를 강화한다. 1970년대 미국의 할렘가에서 시작된 랩은 낙오된 흑인들의 불만과 정서를 담아낸 것이었는데, 파도의 랩 역시 낙오자 취급받는 이들의 분노를 담고 있다. 파도의 랩은 바다의 삶과 죽음에, 낙오된 이들에, 동두천에 헌사하는 진혼곡이기도 하다.

봉만대 감독의 작품 중 <디지털 비디오>(2001)는 매우 주목할만하다. 16mm 가 아니라 “디지털 비디오”로 만들어지는 영화임을 선언하는 듯한 제목은 기존의 AV영화에 대한 선입관은 물론 현재 AV영화계를 초점으로 삼으며 진행된다. 벌거벗은 채 자위행위를 하는 비디오가게 점원남자와 AV영화 여배우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현재 한국의 AV영화계에 관한 비판이 노골적으로 전개된다. 여배우와 제작자를 중심으로 배우와 제작자의 종속관계를 그려내고 있음은 물론 비디오가게를 무대로 하여 AV영화가 소비되고 있는 상황까지를 담아내고 있다. 영화는 목적없이 성적관계만을 담아내려는 일부영화들, 적은 제작비와 짧은 제작기간으로 비디오시장의 불황을 타고 넘어서려는 제작사의 이야기은 물론 섹스횟수와 강도, 음모노출의 여부 등 표면적인 것만 쫓는 에로-매니아들, AV영화를 제대로 취급하지 않으며 반품을 전제로 거래하는 비디오가게의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그렇다고 영화가 상황에 대한 비판만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집을 나와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영역을 지켜나가는 남자의 모습에는 AV영화감독으로서 감독의 모습이 투영되기도 하고, 화가인 비디오가게 종업원과 AV여배우의 사랑을 통해 희망적 미래가 있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봉만대 감독은 많은 작품에서 스스로 기획, 연출, 각본, 촬영을 담당하며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간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 내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꿈꾸는 것이다. AV영화라는 시스템 안에서 2년 동안 15편의 영화들을 만들어낸 감독이지만 어쩌면 그의 이야기들은 이제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봉만대 감독의 영화가 미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AV영화에 대한 오도된 선입관이 강하게 남아있어 그의 영화들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봉만대

1970년생. 94년 <휘파람을 부는 여자>(신우철 감독)의 조감독을 맡으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언더그라운드>(1996, 강용규 감독), <킬링게임>(1996, 강용규 감독) 등의 작품에 조감독으로 참여하였으며, <영상으로 본 팔만대장경>(1996)의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96년 CF 제작사 및 영화사인 ㈜두퍼스를 창립하고 008 온세통신 기업홍보, 목우촌 햄, 박카스, 오리온 칙촉, LG 기업PR, 한석규편 맥심 등 다수의 광고를 제작했다. 이후 99년 일본에서 로케이션 촬영한 장편영화 <도쿄 섹스피아>를 연출하면서 영화계에 복귀했다. 자작 시나리오인 <핑크 펑크>를 개작해 연출한 두 번째 영화 <이천년>(2000)으로 AV영화의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으며, 큰 주목을 받았으며, 주요 연출작으로 <이천년>(2000), <연어>(2000), <디지털 비디오>(2001), <아파바>(2001), <모모>(2001) 등이 있으며 99년 이후 현재까지 15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TRA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해, 파리 / Paris, Je T'Aime : 2007.0203  (0) 2007.02.07
일본침몰 : 2007.0201.  (2) 2007.02.02
"도그마95", 영화 2세기를 열어젖히는 독단적 아방가르드  (0) 2007.02.01
진심 2  (0) 2007.02.01
첫 글.  (0) 2007.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