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 부산에게 ‘영화의전당’은 영화인의 집이요, 꿈이자 소통의 공간

영화정책 2013. 11. 18. 17:39

2043년 ‘영화의 전당’ 하늘연극장에서 열린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영화관과 나>의 한국 첫 프리미어 시사회 자리에 선 영화감독 김부산의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혔다.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수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이 이 자리에 서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것은 김부산의 꿈이었다. 영화에 눈뜨게 해준 곳, 영화감독의 꿈을 품게 해준 곳, 많은 영화와 영화동지들을 만나게 해 준 곳, 자신의 첫 단편영화가 상영된 곳이자 독립적으로 제작한 첫 번째 장편영화가 개봉된 곳, 이 곳들은 모두 한 곳, 바로 ‘영화의 전당’이었다. 김부산에게 ‘영화의 전당’은 단순한 영화관이 아니었다. 학교였고, 집이었고, 고향이라 할만했다. 20여 년 전 ‘영화의 전당’에서 자신의 첫 장편영화가 개봉된 날, 무대인사 자리에서 김부산은 10명 남짓한 관객에게 “‘영화의 전당’ 하늘연극장에서 자리를 가득채운 관객들 앞에 자신의 영화를 선보이는 게 꿈”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 그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늘 꿈꿔온 순간, 꿈꿨던 자리, 바로 이곳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이 영화감독 김부산을 눈물짓게 했다.


부산의 꿈, 그리고 영화


2013년 부산 해운대구에 살던 고등학교 3학년 김부산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어린 시절 가끔 부모님 손을 잡고 영화관을 드나들던 김부산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트랜스포머>를 본 후 영화에 빠졌다. ‘만화영화’로만 접했던 변신로봇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은 꽤 충격이었다. 만화영화는 너무 시시했는데 영화는 달랐다. 영화가 좋아졌다. 


중학생 때부터 혼자 영화관을 찾아다녔다. <아바타>도, <아이언맨> 시리즈도 좋았다. 중학교에서는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와 선배들을 꽤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김부산에게 다른 영화를 많이 소개해줬다. 2010년 한 선배의 추천으로 본 <인셉션>은 더 큰 충격이었다. 이전에 봤던 영화들과는 너무 달랐다.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예술영화’인가 싶었다. 추천해준 선배에게 감사를 전했더니,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이름과 함께 다른 영화 제목들이 돌아왔다. 놀란 감독의 영화들이었다. 선배는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며, 감독이 누구인지 알고 영화를 보면 좋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다크 나이트> 등을 통해 그저 오락으로 생각했던 영화를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고, 영화를 보는 새로운 재미를 느꼈다. 차츰 이름을 외우는 영화감독도 늘어갔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선배는 마지막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은 독립영화 출신 감독이며, 독립영화는 영화 산업의 뿌리다’ 그리고 ‘더 많은 영화를 보고 싶다면 멀티플렉스에만 갈 게 아니라 예술영화관이나 시네마테크 부산이란 곳을 찾아가보라’는 말을 해주었다.


선배의 졸업 후, 김부산은 포털 사이트 등을 통해 가끔 영화 소식을 접하는 평범한 영화관객으로 돌아갔다.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2011년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문득 ‘시네마테크 부산’에 가보라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검색을 하자 ‘영화의 전당’이란 생소한 이름의 영화관이 나왔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개관 기념 영화제가 개최된다는 소식에 그곳을 찾았다. 별 생각 없이 갔을 뿐인데, 그날부터 김부산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본 영화들은 지금껏 봐온 영화들과 달랐다. 영화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2년 전 헤어진 선배를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선배는 영화가 아니라 사람들을 소개시켜줬다. 김부산에게 그들은 영화를 많이 아는 박사이고 천재였다. 개관영화제가 끝나고 ‘영화의 전당’은 휴관하였지만, 2012년 1월은 김부산의 영화인생은 제대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화의 전당’이 맺어준 영화 동료들과 어울리며 더욱 영화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소통의 중심에 선 영화의 전당


2014년 대학생이 된 김부산은 부모님의 반대로 영화과에 입학하진 못했지만 영화감독이 꿈은 접지 않았다. 학교는 크게 상관하진 않았다. 그에게는 ‘영화의 전당’이라는 학교가 있었다. 학교보다 ‘영화의 전당’에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시네마테크’에서는 늘 멋진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부모 세대에 개봉했던 책 속의 영화들을 스크린을 통해 ‘과거의 영화가 아니라 현재의 영화’로 만날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선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순간들이었다. 영화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곳엔 많은 영화 동지들이 있었고, 영화 상영이 끝나면 ‘영화의 전당’이 시네필들을 위해 마련해 준 ‘시네필 카페’에서 영화를 토론했다. 가끔은 유명한 영화평론가들이 함께 자리해 멋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동지들과 영화를 토론하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영화의 전당’은 관객들을 위해 ‘시네필 카페’만 열어준 것이 아니었다. 관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관객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는 ‘관객 옴부즈맨’이 있었고, 매월 첫 째 주 토요일엔 ‘시네필 카페’에서 운영자들이 관객들과 운영과 프로그램에 대해 토론하는 ‘씨네 꼬뮌’도 운영됐다. 이런 자리들을 통해 관객이 제안한 많은 기획들이 채택되었다. 그 중에는 주머니가 궁색한 관객들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제공하는 것까지도 있었다. 이런 기회들은 관객들이 ‘영화의 전당’을 더욱 가깝고 소중하게 느끼도록 했다. 김부산은 매월 발행하는 저널 ‘Cine-tide’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기고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2016년엔 관객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영화인들의 집이자 꿈의 공간


‘영화의 전당’은 소극장 하나를 2014년부터 ‘독립영화관’로 운영했는데, 그러자 부산/경남 지역에서 영화인들이 내 집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김부산에게도 독립영화관은 새로운 기회였다. 영화를 창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네마테크에서 보는 고전영화들도 좋았지만, 독립영화관에서 동시대 독립영화들을 보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같은 지역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지역 독립영화인들의 영화를 보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직접 감독들을 만나 그들의 영화에 대해 토론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김부산의 꿈이었다. 그들을 통해 제작 워크숍을 받을 수 있었고, 영화 창작을 다 체계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2016년 말 입대한 김부산은 제대 후 2019년, 첫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꿈을 향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첫 단편영화는 부산독립영화협회가 주최하는 ‘메이드인부산 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물론 장소는 ‘영화의 전당’ 독립영화관이었다. 감독이라는 꿈이 아주 조금이지만 현실이 되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독립영화관에서는 이미 동년배의 친구들이 만든 장편영화가 많이 개봉됐다.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장편영화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2022년 첫 장편영화를 완성했다. 독립영화였다. 이 영화는 2023년 ‘영화의 전당’ 독립영화관에서 개봉되었다. 영화감독의 꿈이 조금 더 현실이 된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힘이 들 때마다 김부산은 ‘영화의 전당’을 찾았다. 시네마테크에서 고전영화를, 독립영화관에서 동시대 영화들을 보며 마음을 다졌다. 그러면서 언젠가 하늘연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과 만나겠다는 꿈을 담금질했다.


김부산은 하늘연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보며 저들 중 누군가는 영화감독이 되고, 새로운 영화가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자신의 지난날이 겹쳐지니, 살짝 가슴이 벅차졌다. 김부산에게 ‘영화의 전당’은 진정한 집이자 학교였다. 그 곳에는 지금도 영화를 꿈꾸던 동지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집이 유지되는 한, 또 다른 김부산이 영화를 꿈꿀 것이다. 김부산은 오늘 다른 이들에게도 ‘영화의 전당’은 영화의 집이자, 꿈을 주고 이루도록 해주는 공간이 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영화 부산] 4호 (201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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