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축구

축구 2007. 3. 22. 12:34

뜬금없는 축구 포스트! (딴 포스트를 쓰다가 정작 이 내용이 길어서 따로 포스팅합니다.)

제가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별 게 아닙니다. 1998년 어느날 전국의 시네마테크들이 전주 시네마테크 온고을 영화터(지금은 없어졌지요)에서 회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초법적으로 영화를 상영하던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1997년에 이 단체들이 모여서 전국씨네마떼끄연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했지요. 전국씨네마떼끄연합 정기 회의를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했답니다. 서울아트시네마를 운영하는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전국씨네마떼끄연합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녁에 모여 회의를 하고 느즈막히 술을 마신 다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 첫차를 타고 돌아갔을 시간, 게으른 저는 온고을 영화터 사무실에서 아침잠을 자고 느즈막히 일어나 케이블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리모콘을 들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축구 중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우연한 일이었고 그날 경기가 어느팀과 어느팀의 경기였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날의 경험은 꽤나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축구 중계 방송(물론 재방송이었겠지요)을 보면서 '아, 축구가 참 재미있구나'란 생각을 처음하게 되었습니다. 공수의 빠른 전개, 쉴새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는 압박, 그리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 서포터들의 응원소리...

이날 본 경기에서 누가 이겼는지, 몇 골이나 들어갔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 '골의 유무', '골의 형태', '승리팀이 누구?' 이런 것들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요. 앞서 말한 경기의 모습들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나 봅니다. 그것만 기억에 남은 걸 보면 말이죠. 그날 이후 조금씩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축구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두 가지였습니다.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계기는 케이블 방송의 유럽 축구 중계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 백미는 MBC ESPN에서 중계하던 EPL 이었습니다. EPL에는 프리메라리가나 세리에A, 분데스리가 그리고 박지성이 진출하였을 당시의 에레디비지 등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흥분이 있었습니다. 유럽의 정상급 클럽들이 격돌하는 챔피언스리그 역시 주요 시청 경기였지만, EPL이 주는 흥분은 시나브로 저를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지요.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하나의 계기는 게임입니다. 1999년인가 2000년인가 구매한 센스 노트북 덕분이었습니다. 노트북을 구매하니 선물로 'FIFA 2000' 게임 CD를 주더군요. 원래 게임을 좋아하지 않고 잘하지도 않지만 공짜니까, 그리고 그때는 별로 할일이 없기도 해서 열심히 'FIFA 2000'을 했습니다. 재밌더군요. 게다가 선수들 이름도 알게 되고, 팀 이름들도 알게 되고, 자연스레 유럽 축구를 가깝께 느끼게 되었습니다.

별일이 없는 주말 저녁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날, 첼시, 리버풀 등등 유명 클럽들의 경기를 챙겨보게 되었습니다. 평일 저녁 챔피언스 리그 중계도 놓칠까봐 노심초사하기도 하였습니다. 더 많은 정보를 알기 위해 축구 관련 뉴스 페이지, (이제는 엠파스로 옮긴) '토탈사커''사커라인' 등의 웹진을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고, 이런 저런 축구 관련 웹진과 축구중계방송을 하는 방송사의 사이트를 '즐겨찾기'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만족이 안되어 (뭐 활동은 거의 안했습니다만) 유럽축구 관련 온라인 동호회에 가입도 하였지요. 급기야는 SKY SPORTS의 Football 섹션이나, Sports Illustrated의 Soccer 섹션까지 '즐겨찾기' 하게 되었습니다.

심심한 밤에는 EPL의 유명 클럽들의 홈페이지를 찾아보기도 하고, 구글 어쓰에서 유명 클럽들의 경기장을 찾아보기까지 했죠. =.=; 그리고 괜찮다 싶은 축구 관련 서적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기특하게도) 한국 축구를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에 K-리그 경기를 보러가볼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책장 귀퉁이를 채우고 있는 축구 관련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나는 축구를 좋아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뭐. 그렇다고 직접 축구를 즐기는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독립영화인들이 모인 새날 (클럽) 경기에 나오란 이야기를 듣긴 하지만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요. 실제로 축구하러 갈 시간이 없기도 합니다만, 사실 잘못하기도 하고, 챙피당할까봐 두렵기도 해요. :p (그래도 축구를 직접할 시간까지는 정말 없습니다.)

하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 모두에게 환영받는 일은 아닌 상황은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 것을 제어하기도 합니다. <피버 피치>의 주인공처럼 축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합니다만) 생각보다 축구를 지루해하거나 반감을 가지는 사람도 많은데다, 이런 사람들 속에 있노라면 "다른 할일도 많은 이 바쁜 세상에 축구따위를 좋아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잣거리의 말로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 여자들이 싫어하는 이야기가 두 가지가 있다고 하잖아요. '축구'이야기와 '군대'이야기.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는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군대'는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기 때문에 할 이야기도 별로 없을 뿐더러, 하는 것도 즐기지 않아서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축구 이야기는 자주 하긴 하는데 영 반응이 신통치 않네요. :|

포스트가 길어졌습니다. 사실 요즘은 예전처럼 축구를 열심히 챙겨보지 못합니다. 밤새 경기를 보기에는 체력이 달리기도 하고, 조금 흥미가 좀 덜해진 것 같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여유가 별로 없네요.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여유가 없을 때 일수록 취미를 만들어서 삶을 즐겁게 해야한다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호응도 별로 안좋은 걸 즐기는 게 영 마뜩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멈칫거리게 됩니다. 뭐 축구선수될 것도 아니고, 축구 관련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한가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챙겨보나 싶네요.

그래도 "나는 축구를 좋아합니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미 많이 했나? -.-) 뜬금없는 애정고백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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