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회의 하나가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을 가지고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이 회의는 2008년부터 1년에 두 번씩 정례적으로 개최되는 것일 뿐임에도, 행사를 주최하는 쪽과 성공을 기원하는 쪽은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는 양 포장을 합니다. 이 회의 개최를 통해 나라의 ‘국격과 브랜드 가치’가 업그레이드된다고도 하고, 이를 통해 국제무대 리더십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국제회의라면 개최 자체가 의미 있다기보다 세계 사람 모두에게 이익이 될 만한 구체적인 결과를 도출해 내었을 때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도출되기도 전에 뭔가 대단한 회의가 된 것 마냥 떠들어대는 모양새가 그다지 달가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른바 ‘강대국’이라는 나라들만 모여서 ‘그들만의 이슈’를 논의하는 것이 ‘그들만의 이익’을 벗어나 모두의 삶에 얼마나 보탬이 될 지는 미지수이겠지요. 하지만 두고 볼 일입니다. 큰 기대는 없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세상을 좀 더 나쁘게 만드는 일만은 생기지 않기를 일단 바라봅니다.
세계 주요 국가의 정치인들이 서울을 방문한다고 떠들썩한 요즘, 꽤나 조용히 한국을 방문한 해외 정치인도 하나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스웨덴 여성 정치인이자 유럽의회 의원인 아멜리아(Amelia Andersdotter)입니다. 그녀의 방문은 떠들썩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와서 실제로 한국인을 포함한 전 세계 민중들의 삶에 보탬이 될 만한 이슈를 나누었습니다. 아멜리아는 이름도 생소한 스웨덴 ‘해적당’(http://www.piratpartiet.se)의 정치인입니다. 스웨덴 해적당은 2006년 1월 1일 창립한 4년차 정당입니다. 해적당은 리카르도(Rickard Falkvinge)라는 사람이 2006년 치러지는 스웨덴 총선에 맞춰 ‘지적재산권을 제한하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담은 해적당 웹사이트를 개설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해적당이 창당된 해 5월, 미국영화협회(MPAA)가 스웨덴 정부에 저작권 침해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있었는데요, 이에 따라 스웨덴 경찰은 비트토렌트(Bit-Torrent) 검색 사이트인 해적만(The Pirate Bay)의 서버를 압수하여 해당 사이트가 3일간 접속이 차단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저작권 문제는 스웨덴 국민들의 관심사가 되었고, 이 일을 겪은 후 해적당의 정책에 공감하는 스웨덴 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해 2009년에는 스웨덴 정당 중 당원 규모가 세 번째로 큰 정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적당은 200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7.13%를 득표하며 의석을 두 자리나 차지하는 정당이 되었습니다.
스웨덴 인들이 공감했다는 해적당의 정책은 무엇일까요? 해적당의 정책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 문화’, 둘째는 ‘자유지식’, 셋째는 ‘개인의 존엄성과 프라이버시 보호’입니다.
첫 번째 정책인 ‘자유문화’는 ‘저작권 제도를 본래의 취지에 맞도록 개혁하자’는 것입니다. 애초에 저작권이 생긴 목적은 창작과 창작물의 확산을 균형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현행 제도는 창작물의 확산은 물론 창작마저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문제설정입니다. 재산권의 확대를 위해 혁신된 기술을 통제하고, 이용자는 물론 창작자에게까지 형사 처분을 남발하는 현행 저작권 제도는 절대로 문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해적당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저작권의 남용은 저작재산권의 배타적 보호기간이 자꾸 늘어나는 형태로 구체화되는데요, 독점적 저작재산권 보호 기간을 5년으로 하자는 것이 이들의 정책입니다.
두 번째 정책인 ‘자유 지식’은 ‘특허제도를 폐지하자’는 것입니다. 특허제도는 인류에 도움이 되는 발명과 아이디어 생산을 위한 것이었지만, 현재 특허제도는 거꾸로 인류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설정입니다. 현행 특허제도는 과학 기술의 혁신에 장애가 됨은 물론이고, 특히 의약품 특허의 경우에는 제3세계 사람들을 질병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류에 도움이 될 연구 성과가 수익 창출을 위해 제한되거나 숨겨지는, 폐해만 가득한 특허 제도의 폐지하자는 것이 또 하나의 정책입니다. 이는 잃을 것이 없고 얻을 것만 있는 정책이라고 설명합니다.
세 번째 ‘개인의 존엄성과 프라이버시 보호’는 국민을 상대로 한 감시와 통제 강화에 반대하는 정책입니다. 9.11이후 유럽에서도 강화되고 있는 인터넷 등에서의 시민 감시에 반대하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해적당은 위의 세 가지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 정책 영역에 관여하는 것은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데요. 해적당의 이 세 가지 정책과 정책 배경은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것이 아니며, 바로 지금 여기 우리에게 당면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저작권 보호’라는 이름으로 영화와 음악 등 문화 콘텐츠의 저작재산권 보호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개별 재산권자가 콘텐츠를 ‘유료’로 다운로드 받지 아니한 개인을 상대로 소송과 합의를 종용하는 것으로 시작된 재산권의 강화는 저작권법의 개정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대응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허권의 경우는 국민의 건강권에 직결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미자유무역협정 등의 자유 무역 강화를 위해 다국적 제약회사의 재산권을 위해 개혁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고 있습니다. 의약품 특허 제도의 개혁과 의약품 접근권 향상을 위한 강제실시 등의 제안은 전혀 수용되지 못하였고, 약가가 인상되며 백혈병, HIV(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 감염인 등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시행되는 인터넷 패킷 감청, 도청, 이메일 감청 등은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나 프라이버시가 극단적으로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해적당의 주장은 한국 독립영화 진영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특허제도의 폐지나 개인의 존엄성 및 프라이버시의 강화는 물론이거니와 ‘균형 잡힌 저작권을 위한 제도 개혁’은 ‘창작한 영화의 배급과 활용’이 과제인 독립영화 창작자들에게는 매우 필요한 토론 거리이기도 합니다. 한국 독립영화는 분명, 주류영화와는 다른 저작권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입장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토론되고 정리된 적은 없습니다. 저작권 제도에 대한 입장은 ‘우리는 주류 저작권 제도와 다르다’ 정도로 정리하는 것 이상을 이제는 넘어서야 합니다. 다르다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그 가치에 따른 정책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해적당이 제안하는 저작권 제도의 개혁이나 보다 구체적으로 제안된 배타적 저작재산권 기간 등의 정책은 ‘배급과 활용’을 고민하는 창작자라면 반드시 고민해볼만한 이슈입니다.
독립영화의 ‘다른’ 저작권 제도에 대한 논의는 배급사나 정책 담당자들이 주도하기는 어려운 이슈입니다. 한국 독립영화의 경우 영화 산업과 달리 저작인격권과 재산권을 모두 제작자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괄적인 저작권을 가진 저작권자가 자신의 저작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가능하다면 합의된 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독립영화와 저작권 관련 주제가 보다 구체적이며, 저작물의 활용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토론되어지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 해적당과 관련된 내용 및 관련 자료들은 “우리도 해적이다!; 해적당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모임” 블로그(http://pirateparty.kr/blog)를 발췌, 참고하였습니다.
* 미국영화협회의 저작권 침해 고발로 인해 해적만 사이트가 서버 압수되고 접속 차단되는 일련의 사건과 그 배경은 다큐멘터리 영화 <이 영화를 훔쳐라 Steal This Film> 1편과 2편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