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도의 세상, 영화와 시간.

TRACE 2008. 12. 27. 12:24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사다난했던 2008년도 이제 한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몇 밤만 자고 일어나면 새해가 됩니다. ‘어차피 자고 깨어나지 않는 다음에야 다른 날을 맞는 것일 뿐인데, 그 시간을 나누어 사고하는 것이 뭐 대단한 일인가?’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해가 바뀌는 것은 ‘어제, 오늘, 내일’ 이렇게 하루하루가 바뀌는 것과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매우 다른 일입니다. 대부분의 자연인들, 그리고 법인이나 기관들은 이맘때 즈음이면 1년을 평가하고 다음 1년을 준비하는데 시간을 보낼 듯합니다. 인디스페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디스페이스는 지난 1년 동안 매우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특히 1월부터 12월까지 꼬박 1년을 보내본 첫해인데요, ‘독립영화전용관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실행한 한 해라고 대충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대부분의 일들도 시간을 나눠서 사고하겠지만,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일하는 것은 1년을 4분기로, 그리고 그 4분기를 다시 1개월으로, 1개월을 다시 2주로, 2주를 다시 1주로 나눠 시간을 사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난 1년 동안은 독립영화를 전문적으로 배급하는 자연인과 법인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매달 관객들에게 선보일 영화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한 해였습니다. 조금 부연하자면 영화가 완성되었다고 해서 ‘개봉’ 상영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가 ‘개봉’ 상영되기 위해서는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고, 시간을 만들고, 관람료를 지불하게끔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인디스페이스에게 지난 1년은 제작된 독립영화들 중 몇 편이 이런 과정을 거쳐 관객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 과정들을 전문적으로 책임질 배급사들의 등장은 인디스페이스와 독립영화 진영에게 매우 반갑고도 소중한 일인 것입니다.)

몇 밤을 지낸 후 마주할 새로운 해에도 시간을 나눠서 사고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1년은 관객들에게 선보일 영화를 ‘만들어내는’ 시간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관객여러분들이 보다 기대할 만한, 소중한 ‘전진’이 될 것입니다.

이쯤에서 내년에는 더 잘하겠다는 식의 이야기 대신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최근 개인적으로 많이 생각하는 것은 ‘시간의 속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언급해왔겠지만, 최근 들어 ‘시간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고 느끼면서 개인적으로 자주 생각하곤 합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속도가 붙을 것인가?”, “어떤 힘이 ‘시간의 가속도’를 만드는 것일까?”, “이 가속도는 이롭고 정당한 것인가?”, “이 가속도를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이 ‘시간의 가속도’는 단위 시간 동안 일상 생활의 빠르기가 빨라질 때 보다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예를 들면 하루에 처리해야할 일의 양이 늘어나 일을 더 빨리해야할 때나 처리해야할 일의 양이 너무 늘어 정해진 시간을 초과해 일을 해야할 때, 삶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구나하고 느껴지는 것이지요. 게다가 일의 양은 많아져 더 많은 시간 일을 해야 하지만 이에 비해 노동의 대가가 늘어나지 않거나 외려 줄어든다면 가속도는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다가오고, 과연 어느 순간까지 견딜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기왕 시작한 김에 좀 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시간의 가속도’는 ‘동영상의 가속도’라는 방식으로 구체화되기도 합니다. 블록버스터 영화나 TV 버라이어티 쇼프로그램의 빠른 전개와 이를 위한 짧은 편집과 현란한 화면 구성은 잠시의 지루함도 견디지 못하는 관객들/시청자들을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매순간 재미를 주는 이 가속도는 재미 외에 다른 것을 느끼거나 생각할 일말의 틈조차 내주지 무시무시한, 강요된 속도일 뿐입니다.

‘시간의 속도를 누가 가속시킨 것일까요?’, ‘이 가속도에 맞춰 살아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이 가속도는 정당한 것일까요?’. 이런 생각조차도 ‘시간의 가속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야만 가능하겠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화’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 강요된 가속도를 무비판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속도가 붙기 이전의 ‘시간의 속도’를 재현하거나 가속도의 시간과 다른 ‘영화적 시간’을 창조해 ‘가속도’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지금 영화에게 필요한 역할은 아닐까요? 물론 영화가 가속도에서 일탈해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고 해서 세상의 속도가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외려 가속도에서 일탈된 영화가 버림받는 경우가 더 비일비재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다른 시간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간의 속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간을 다루는 매체’인 영화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시 지사적인 어투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만, 한 해가 저물어가고 새해가 다가오는 지금, ‘시간의 속도’에 대해 멈춰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모두들에게 느즈막히 제안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모두들, 한 해 살아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INDIE SPACE on PAper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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